생명의전화는?
호주 시드니의 중앙감리교회 알렌 워커( Alan Walker )목사에 의해 구상되어 탄생되었다.
생명의전화 발단 알렌 워커 목사
생명의전화의 발단 알렌 워커 목사는 다음날의 설교를 준비하고 있던중 자정에 로이 브라운이라는 청년으로부터 전화를 받게 되었다.
38살의 그청년은 빚을 지고 절망에 빠져 있었고, 자신의 앞날이 암담한 나머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해서 전화를 한 것이다.
30분간의 전화통화를 해서 알렌 워커 목사는 그사람이 절망에서 헤어나 새 삶의 길을 찾도록 정성껏 얘기 했다.
교회 예배에 참여토록 권유하고 도움을 주어 생명을 연장하려고 노력 했지만, 로이브라운이라는 고아 청년은 킹스가의 가스가 가득찬 방에서 죽어 갔다.
한 생명의 죽음은 알렌 워커 목사에게 충격을 주었다.
도시는 거대하며, 분주한 군중 속에서 고독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스도의 손길로 있는자와 없는자,남자와 여자,젊은이와 늙은이가 서로 해결하며 도와 줄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했다.
궁리끝에 해결의 실마리를 열어 준것은 바로 전화벨 소리 였던 것이다.
생명의전화의 계기
그 날도 새벽2시에 걸려온 한 부인의 울음 섞인 목소리와 함께 전화벨 소리에 더욱 확신을 가지고 전화상담을 착상하게 되었는데,한번도 본일이 없는 사람에게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30분간이나 털어 놓은 것에 윤곽이 잡혔다.
도시에서 전화 한대의 장비로 수 백만인의 기쁨과 슬픔이 따뜻한 마음과 절망의 절규가 전달 될 수 있던 것이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전화선 하나가 이 큰 도시를 구원할 "구원의 손길"이 될 수 있음을 확신하였다.
생명의전화의 태동
알렌 워커 목사는 자신이 시무하고 있는 교회의 선교부 실행위원회에 이 안을 제시했다.
많은 분들이 의아해 하고 불가능한 일이라고 반대 헀지만 여러 차례의 회의와 알렌 워커 목사의 집념의 호소가 받아들여 져서 구체적인 토의가 이루어 졌다.
생명의전화의 시작
안원구성,원조,훈련등의 문제가 의논되었고, 1년간 준비를 통해 시드니 사람을 중심으로 한 지역유지에 의해 10만달러의 센터 기금을 마련하고 매스컴을 통해 개인적인 기금을 모았다
1962년 6월에는 제1회 전화카운셀러 훈련을 시작하였고,센터빌딩도 완공되고 10명의 직원을 임명했다.자원봉사자 교육을 통해 150명의 등록자 중에서 120명을 카운셀러로 선발하였다.
고독한 사람으로부터 절망 중에 자살하려는 사람,갈등으로 몸부림치는 사람으로부터 패배자가 되어 버린 사람,미혼의 어머니로 부터 파경에 이른 가정,버림받은 아이들, 집없는 사람,회의에 빠진 학생,신앙없이노후를 맞아 죽음의 공포에 떠는 노인등등 구원을 외치는 절규가 수없이 들려 왔다.
생명의전화의 발전
이렇게 시작된 전화 상담은 하루 4교대 계속 이어지고,호주의 다른 도시들로 번져 갔고,마침내세계 각국으로 소개되기에 이른다.
한국생명의전화 운동은?
이영민 목사의 사회봉사에 대한 열정과 집념에 의해 시작되었다.
한국생명의전화의 발단
1969년 가을 이영민 목사는 스위스 "봇세이 연구원"에서 개최한 "교회의 미래"라는 주제의세미나에참석 중 크리스마스를 프랑크푸르트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때 H.가이슬러 목사의 안내로 "텔레폰실졸게(Telefonseelsorge)"라는전화상담 기관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이영민목사는 사회 봉사를 위한 새로운 세계에 눈을 띄게되었고 교회의 특수 분야에 대한 가능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한국생명의전화의 구체화
이영민 목사는 한국생명읮너화의 구체화 그리고 이영민목사는 귀국 길 영국 런던에서 "새마리탄(Sanmaritang)"전화상담 단체의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활동상황을 둘러 보고 자신의 특수 목회에 대한 신념을 더욱 구체화하기 시작 했다.
1970년 4월 봇세이의교육 과정을 마치고 귀국한 이영민 목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교회의 사회활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여 많은 격려를 받았고, 이에 그 구체적인 사업을 구상하게 되었다.
한국생명의전화 태동 그 첫 단계
한국생명의전화 첫 단계로,조항록 목사를 위원장으로 하는 "아가페의집"사업추진위원회를 조직하고 1971년 1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추천을 받아 세계교회협회(WCC)에 "아가페의집"사업 보조 신청을 보내 3만 5천불의 원조를 받게 되었다.
이사회에서는 전화 상담을 위해 한국기독교회관에 장소를 마련하는 한편 서울 무교동에 다방을 운영하기로 하고 우선 1973년 6월1일 "아가페의집"커피하우스를 개점하게 되었다.
그래서 방황하는 청소년들에게 대화의 장소를 제공하여 삶의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하고 서로의 만남을 통하여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가질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가페의집"은 서울시의도시 재개발사업으로 생명의전화운동을 태동시킨채 12월 결국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준비작업은 "아가페의집"사업과 함께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새로운 생명력으로 무럭무럭 자라나 가시적인 결실을 맺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기도와 헌신적인 봉사
한국생명의전하 시작은 많은 사람들의 기도와 헌신적인 봉사로 "서울생명의전화" 는 1976년 9월 1일 정오 "도움은 가까운곳에"라는 표어를 걸고 한국기독교회관에서 역사적인 개통식을 가졌으며,이것이 "한국생명의전화"의 모체가 되었다.
생명의전화는 개원 후 우리나라 전화상담기관의 효시로 본격적인 자원봉사 운동을 시작하였고 이웃과 사회를 위한 봉사의 전범으로 자리 잡아 갔다.
한국생명의전화의 발전
생명의전화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은 위기와 갈등,자살기도등의 복잡한 삶의 문제의 해결에 도움을 받고 있으며,이를 통해 생명의전화는 우리사회의 정신건강을 보살피는 도구가 되어 왔다.
특히 생명의전화 자원봉사 상담원들은 크리스찬으로서 예수의 통찰력을 바탕으로 한 특수성을 갖고 있지만,포괄적 사역으로서 교회연합운동의 모범을 보이며,"하나님의 선교자"사명을 감당하고 있다.